일본 메이지 정부 시절 메이지 왕이 신하들에게 내린 ‘5개조 선언’에서 유래한 단어가 있습니다. 우리 귀에 너무도 익숙한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버젓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국위선양”입니다. 국위선양은 메이지 일본을 세상에 널리 알리자는 말이었고. 다들 알고 있듯이 그 방법은 침략전쟁이었습니다(어용사전 참조).
침략주의 언어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사용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언어는 그 시대의 정신을 담고 있는 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침략주의 언어를 그대로 아무런 반성없이 사용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국가주의체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주체적 결정권자인 시민 혹은 민중으로서 인간의 자리를 유지해야 함에도,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이 인간의 자리를 규정 혹은 강탈하는 체제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읽을 수 없는 단어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한참을 생각해야 뜻을 알 수 있는 단어들이 쓰여지고 있습니다. 국어사전에도 없는 단어들이 방송에서 자막으로 사용됩니다.
서로 대화를 나누는데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습니다. 문자를 보내오는 사람들이 쓰는 단어를 해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면 손전화를 꺼버립니다. 짜증이 나기 때문입니다.
대화가 되지 않는 상대와 마주한다는 것은 고통입니다. 그래서 이내 등을 돌립니다.
결국 소통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개별화된 인간만이 존재하는 사회, “우리”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인간은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부품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불안합니다. 그리고 불안을 감추기 위해서 언어의 명확성을 회피합니다.
불안은 인간을 통제하기 위한 효과적인 기제입니다. 불안을 이용해서 이익을 얻으려는 자들이 나라를 운영하는 시대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경제위기라는 불안을 이용해서 재벌은 자신들의 위치를 확고하게 유지하고 더 큰 이득을 얻습니다. 현존하는 불안세력이라는 북한을 이용해서 끊임없는 방산비리가 발생했고, 소총에도 구멍이 뚫리는 방탄복을 우리 아이들이 입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교묘하게 침략주의 언어를 정신개조의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나는 소중합니다. 내가 소중한 이유는 여러가지 이지만 그 중 하나는 “내”가 “우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선명함“을 전제합니다. “나”와 “너“가 선명할 때 “우리”가 될 수 있고, 이렇게 형성된 “우리”는 집단의식을 형성하는 힘이 됩니다.
그런데 나의 선명함은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의 명확성”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는 명확한지요. 드러남이 없는 언어는 불안을 감추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