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밭 떼기 하나없는 너무나도 가난한 농가집에서, 떫거나 시지 않은 인생을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는 때가 가끔 있었다.초년시절 중학진학이란 꿈도 꿔 볼 수 없는 가정 형편에 나이 18세에 남양면 소재 구봉광업소 1천미터 막장 공부로 운곡 집에서 왕복 36km 되는 길을 자전거로 출퇴근 하는 소년 막장 광부였다.요즘같은 추운겨울 눈 내리면 자전거 길은 너무나도 위험했고 비오는 장마철이면 머리 위에서 엉덩이 밑까지 흘러내리는 비는 온몸이 흠뻑 젖기가 일쑤였다.21세에 육군에 입대, 논산 훈련소를 거쳐 3군단에 배속되었고 다시금 동부 최전방 12사단에 복무 중 자유우방의 평화를 위한답시고 베트남 전에 참전하고 귀국 후 중부전선 25사단 포병부대에 배속되어 35개월의 병역의무 전역 후 인천 송림동에서 트럭 운전 기사로 3년여 직업을 택하여 일했다.그러나 외아들이며 막내로 태어난 나를 늙으신 부모님은 운전하는 직업에 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명절 때 고향에 오면 옷자락을 붙잡고 우셨다.전쟁터에서 받은 수당과 인천 등지에서 모은 돈으로 자갈 논 밭이라도 사서 곁에서 같이 살자는 부모님의 간곡하신 소원에 70년도에 따논 운전 면허증은 장롱 속에 넣어 버렸다.결국 젊은 나의 혈기는 상록수의 열 번 독서로 새마을 지도자로 변신되었고 마을의 이장이 되어, 늙으신 부모님이 세상을 뜨시면 도시로 나가 살려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지역의 낙후된 농촌 현실을 개척하고자 타관살이로 눈물나게 모았던 재물을 지역사회에 기증하였으며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걱정하기 전 내 자신이 남에게 알려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젊은 청춘을 불태웠다.천수답으로 하지가 지나도 비가오지 않으면 콩이나 조를 심던 48정보의 마른갈이 들녘을, 국회로 도청으로 지원요청으로 3km 하천의 물을 끌어 올려 문전 옥답으로 만들어 놓았으며 일년이면 운동화를 여섯 켤레 씩 달아 없어지는 상록수의 세월 15년여의 새마을 협회장. 이장으로 헌신한 공로로 리민의 이름으로 소재지 공마당에 리장 윤명희 공적비가 세워졌다.1995년 6월 2일 청양군의원에 당선되어 연속 3선 의원을 역임한 영광은 평소 대인관계가 의리를 견지한 덕분의 결실이였구나 생각된다.지금에 와서 어느 때인가 도시로 가서 살려던 젊은 날의 꿈은 끝장이 나 버렸고 인생 70고희를 맞아 버렸다.내 비록 고의를 맞아 논 밭 한 떼기 없이 위토답으로 살고 있지만 지나간 30여년의 기적을 후세들에게 전해질 이장 공적비와 군의원 공적비가 운곡면 소재지 공마당에 우뚝 서 있으니 인생사 멀 더 바라겠는가? 부자들 부러워 하지 않고 남은 여생 열심히 살아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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