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아온 고향! 그 옛날 고향의 세월은 연자방아 연륜처럼 돌아가고 낱 닭이 길게 울었답니다.거기에 복사꽃 살구꽃이 곱게 피어나고 뒷도랑 개울가에 개나리꽃 노랗게 물들 때면 이웃집 순이와 냉이캐던 어린시절이... 그 옛날의 고향은 비 내리는 학교길에 강냉이 자루를 뒤집어 쓰고 등·하교 길인데도 누구하나 비웃진 않았습니다.월사금을 내지 못하여 학교에서 쫓겨 다닌다고 누구하나 흉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자꾸만 자랐던 것입니다.너무도 가난한 집안 형편에 중학교는 꿈도 못 꿔보고 언제인가부터 사회에 대한 증오와 비판을 하며 반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1967년 8월 16일 어느덧 나는 풀색 옷을 입었습니다. 국민의 의무를 지키려 군에 입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조국은 가난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정부는 가난을 숨기려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권태증을 느낀 것입니다. 군대란 생활에...나는 솔직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조건은 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자유우방의 평화수호를 위해 대한민국의 육군이 되어 베트남 전쟁에 참전을 했었습니다. 생사를 넘나드는 용전분투를 경험삼아 인내력을 깊은 곳부터 맞보려 했습니다. 어찌 보면 가난한 조국의 경제발전에 전투수당의 달러가 일부분의 도움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미국은 한국군이 월남전에 파병을 안 해주면 한국주둔 미군을 철수하여 월남전에 투입한다는 계획에 우리 남한은 북한의 남침에 어쩔 수 없이 월남파병이란 카드가 만들어 졌는지도 모릅니다.천부께서는 내게 삶을 주셨다지만 나는 삶을 영위하기가 힘들었습니다. 1970년 군 전역 후 4년간의 대처생활을 뒤로하고 가난한 고향, 농촌발전에 앞장서 보려 15년간 농촌지도자와 마을 이장을 맡으며 신발이 닳도록 뛰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리네 산골 농민의 삶은 어차피 고단합니다.열심히 일하고 정직하게 살아도 거창한 미래는 꿈을 꿀 수 없고 도회지 사람들의 즐겁고 문화적인 생활상을 볼 때 농촌에 묻혀 사는 것이 짜증이 날 때도 있었답니다.조상 탓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이유 없는 반항이란 걸 알았을 땐 난 가진 것 모든 것 다 지역사회에 기증해 버린 가난뱅이가 되어 버렸습니다.어느덧 쉬흔 일곱이란 세월이 훌쩍 넘어 육십 고개를 시작했습니다. 내 비록 가난하여 바라는 바 기대하는 바가 없더라도 남을 위해 이웃의 어려움을 같이 나누며 주민을 대변 할 군의원이란 선량(善良)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과연 나는 3선 의원 재직 시 국가와 지역발전을 위해 얼마나 기여해 왔는가 혹여 나에게 3선의 영광을 안겨준 군민들로부터 지탄받았을 일을 하지는 않았었던가... 책임감을 느낄 때도 있답니다.요즘 마을 앞, 화사한 벚꽃을 볼려치면 1999년 군의원 재직 시 도비·군비 합산하여 심어놓은 화창한 벚꽃 길에 25년 전 운곡면 공마당에 리민들이 세워 논 리장 공적비며...지난해 면민들께서 세워주신 군의원 공적비가 요즘 벚꽃 행렬 속에 더욱 빛나는 화창한 봄날을 만들고 있답니다.이제는 고희(古稀). 지난 세월 속에 후회 없는 남은 여생 살아가며 오늘도 지난세월을 회상(回想)에 젖어본답니다. 2016년 4월 봄날에2016년 4월 봄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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