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1주년인 2016년 보훈청에서 8월의 독립운동가에 선정 된 이물이 의병장 채광묵이다.8월에 앞서 보훈의 달인 6월에 의병장 구연, 채광묵에게 나라사랑의 길을 물어본다.채광묵은 1850년 7월 15일에 청양군 화성면 매평리에서 태어나 1906년 5월 31일 홍주성에서 부자(아들, 규대)가 함께 장렬히 싸우다 전사한 자랑스러운 청양인이다.채광묵은 어려서 성품이 강직하고 의(義)와 용기가 있어 옳은 일에 앞장서는 성품으로, 시(詩)에도 능하여 그를 화남선생이라 부르기도 했다.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의 시해사건(을미사변)으로 나라가 어수선 해지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낙향하여 의병을 모으고, 각 지방을 순회하면서 항일투쟁을 도모하기도 하였다.그해 11월 29일에는 의병 180명을 이끌고 홍주성에 들어가 안병찬, 박창로 등 여러 동지들과 의거할 것을 논의하여 홍주의병의 태동이 되었다.그 후 그는 청양지역에 낙향하여 의병을 도모하고 있는 전, 이조참판 윤조, 민종식을 중심으로 청양에서 거의할 것을 도모하고 1906. 3. 17일 청양장날 홍주성으로 출정하는 청양의병의 깃을 올리기도 했다.출정 당시에는 병세가 있어 아들(채규대)이 만류하였으나 “국난을 당하여 순사(殉死)함은 평소 내가 가졌던 뜻이거늘 어찌 집 안에만 있을 까보냐”라며 부자와 함께 의병에 가담하여 전사한 유일한 분이다.그는 홍주성 공략과정에서 민종식을 의병대장으로 하고 채광묵은 참모장으로 청양과 홍산, 서천과 남포, 보령과 광천, 그리고 결성을 걸쳐 5월 19일 청양에서 출정한지 63일 만인 홍주성을 탈환하게 되니 청양의병이 위와같은 이유로 곧 충남의병이라 한다. 의병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죽음으로 사수 할 것을 결의하게 된다.홍주성 탈환이후 수차례의 공격을 막아냈으나 새로운 무기로 잘 훈련된 일본군을 막아내기는 역부족으로 5월 31일 홍주성을 끝내 내주면서 채광묵과 아들 채규대는 “최후의 한사람가지 싸워야 한다”며 화염 속을 해치며 병사를 지휘하였으나 결국 의병장 채광묵과 그의 아들 채규대 부자는 홍주성에서 장렬히 죽음을 맞이한다. 또한 부자의 시신은 찾지 못하여 평소 입던 의대로 초혼하여 청양군 남양면 신왕리 압수선영에 채광묵 부자의 묘가 있다. 또한 그를 두고 “부사충(父死忠)이요, 자사효(子死孝)”라며 아버지는 죽어 나라에 충성하고, 아들은 죽어 부모에 효한다. 많은 사람들은 흠모하고 있다.광복 71주년 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진정한 나라사랑의 길을 의병장 구연 채광묵에게 물어본다.(참고문헌) 청양군지,홍주의병실록, 한국의병사(이태룡)1)청양의병이 위와같은 이유로 곧 충남의병이라 한다.2)아버지는 죽어 나라에 충성하고, 아들은 죽어 부모에 효한다.
정학진(전 청양군기획감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