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회에서 백제의 멸망은 군사적 패배가 아니라 내분에 의한 것임과 의자왕 4년에 ‘융’을 태자에 책봉하였음에도 의자왕대 후기에 ‘소왕’으로 불린 ‘효’가 권력의 상위로 등장하였다고 설명하였다. 즉, 태자의 위치의 변동을 말했다. 이 내용은『삼국사기』에 의자왕 15년에 태자궁을 화려하게 수리하였다는 기사(『삼국사기』권28,「백제본기」6, 의자왕 15년조.)가 기록되어 있어, 태자의 교체나 태자의 지위에 버금가는 권력의 등장을 상정하고 있다. 이런 변동에 의자왕의 정책의 변화에 따른 지지층의 변동과 기존 권력층의 새로운 권력부의 갈등이 나타났고, 갈등의 전개에 따라 백제가 멸망하기 전에 여러 이변이 일어났다는 기록과 태자 ‘융’이 당에 항복한 배경, 의자왕이 전쟁을 지속하려 웅진성으로 몸을 피했을 때 의자왕을 구속하여 항복한 웅진성주 좌평 예식(진)의 행동 배경이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백제 멸망기의 혼란상을 보여주는 ‘이변’의 기록이 여러 가지가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지만, 태자 자리를 둘러싼 암투를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타나는데, 삼국사기 의자왕 19년조 기사에 ‘2월에 여러 마리의 여우가 궁궐 안으로 들어왔는데 흰 여우 한 마리가 상좌평의 책상에 앉았다. 여름 4월에 태자궁의 암탉이 참새와 교미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백제 멸망의 원인이 자신의 아들 ‘효’를 태자에 앉히기 위해 내부갈등을 일으킨 군대부인 은고에게 탓이 있다는 방향으로 비난하는 기류를 알 수 있다. 이도학의 연구(「백제 의자왕대의 정치 변동에 대한 검사」 ,『百濟文化』33, 2004.)에서는 당이 백제 멸망의 장본인인 은고의 아들 ‘효’의 태자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전 태자였던 ‘융’을 복권시키는 과정을 거쳐 ‘효’의 정권적 위상을 축소시킨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실제 여러 기록에서 태자 ‘융’은 친당적인 정치행태를 보였고 ‘효’는 친일적인 정치행태를 보인 것이 나타난다. 요약하면, 의자왕의 대외정책과 정치노선의 변화와 맞물려 후기에 은고가 등장하여 자신들의 일당이 권력싸움을 일으키며 그의 아들인 ‘효’를 태자의 지위에 버금갈 만큼의 성장시킨 것으로, 후기에 들어 태자의 교체 문제가 진행 중이었다고 보인다. 이에 대한 연구로, 이도학의 연구(「백제 의자왕대의 정치 변동에 대한 검사」 ,『百濟文化』33, 2004.)와 박민경의 연구(「무왕ㆍ의자왕대 정국운영의 연구」 ,『韓國古代史硏究』20, 2000.)에서 공통적으로 당시 ‘효’는 태자가 아니라 소왕으로서 실권을 잡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신현철 청양문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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