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왕조 내내 주변의 국제정세에서 고구려와의 관계, 신라와의 관계, 일본과의 관계, 중국과의 관계는 항상 국가적 위상을 결정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무왕대와 의자왕대의 중국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수·당이라는 통일된 큰 국가가 형성된 이후 중국의 정세는 이전 어느 시기보다 한반도 정세에 민감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수·당 역시 동북아시아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 직접 한반도 정세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특히 무왕 후반기는 당이 건국되면서 당과 새롭게 관계를 맺어 갈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무왕대에는 백제가 당과 우호적인 관계의 형성을 위해 적극적인 행동을 보였다. 그러나 맹목적인 추종이 아니라 백제의 이익을 위한 행보의 특성이 나타나고 있다. 의자왕 전기까지 백제의 주변국에 대한 태도를 보면 고구려에 대해서는 유화적인 입장으로 전환하고 당에 대해서는 신라와 밀접해지지 않도록 끼어들며 신라를 지속적으로 공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의자왕 전기까지 백제가 중국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무왕 25년(624년)의 기록에서 짐작할 수 있다. 『삼국사기』권27, 백제본기5 무왕조 기사에 ‘25년 봄 정월 <大臣>을 당에 보내어 조공하였다. 고조(당 황제)가 그 정성을 훌륭히 여겨 사신을 보내 대방군왕 백제왕(帶方郡王百濟王)으로 책봉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그런데 사신으로 파견된 사람을 ‘대신(大臣)’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의 전후의 『삼국사기』사료를 보면 대개 사신을 파견한 것을 ‘견사(遣使)’로 표현하거나 혹은 627년에 복신을 보낸 경우처럼 사신으로 보낸 그 사람의 이름과 인적사항을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름이나 인적사항 없이 ‘大臣’이라고만 기록하고 있다. 大臣이라는 호칭을 쓴 경우는 많지 않지만 『삼국사기』몇 군데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삼국사기』권5, 신라본기5 선덕왕 원년(632)조에 大臣 을제가 정치를 총괄하였다는 내용, 『삼국사기』권7, 신라본기7 문무왕 10년조 기사에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를 ‘고구려 大臣’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뒤 당으로 잡혀간 이들 중 왕과 왕족 이름에 이어 ‘大臣 ○○’으로 표기한 인물들이 기록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대개 『삼국사기』에서 大臣이라는 표현을 쓸 때는 당시 그 나라에서 왕과 왕족을 제외한 사람들 중에서 중요한 권력층을 나타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大臣’을 파견하였다는 것은 이 시기에 중국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판단하여 백제가 당시 백제 내에서 강한 권력을 가진 인물 중 하나를 보냈을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특정한 시기에 백제에서 서열이 높은 사신을 정기적으로 보내 적극적인 대응을 하였다. 이렇듯 당에 대해서 우호적인 외교 노선을 지속하면서 대신라전을 전개하는 대외 정책은 무왕 이후 의자왕 대 초기까지 지속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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