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2015년 군정목표를 “역사 문화 예술의 도시 청양”으로 정하고 2015년 8월 “의병장 윤조 민종식은 진정 청양인이다”라는 광복절 특별 기고문을 준비하면서 이대로 공직에 더 머무르면 청양인으로, 청양에 대한 사랑이 식어 질 수 있다는 소명의식과 사명감을 갖고 38년여의 공직생활을 정년 2년을 남겨두고 접은 이유도 그중하나다.그동안 여러 편의 기고를 통해 밝힌 바 있는 “의병의 본향이 청양”이라는 사실에 이어 청양의병은 청양현감이 직접 창의한 의병으로 “의병의 발상지가 청양군”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2회에 걸쳐 본 기고를 통하여 밝힌다.청양의병을 창의한 정인희(鄭寅羲)청양현감정인희는 구한말(고종 31년 ~ 고종 32년)에 청양현감(이하 군수로 표기한다)으로 재직한 인물이다. 그의 행적은 청양군수로 재직당시 의병을 창의하여 그 직을 사임한 것으로 청양군지에 짤막하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당시 일본의 내정체제에서 당시 현직 군수가 의병을 창의하고 선봉장이 되었다는 것은 조선팔도를 다 뒤져도 청양만이 있었던 유일무이한 사건중의 사건이다. 제천의병의 경우 의진에 의해 군수가 도망쳤다는 기록이 이를 증명해 준다.1. 정인희 청양군수 인물조명정인희(1849 ~ 1918) 청양군수는 1894년 부터 1895년(고종31년 ~ 32년)까지 청양군수로 재직한 인물이다.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이 선포되자 정인희 청양군수는 “청양의병창의소”를 설치하고 의병활동과 지원을 아끼지 아니한 유일한 군수였다. 위 사건과 관련하여 홍주의 김복한과 이설이 상소를 올렸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서울 경무청에 구금되었다가 한달만에 풀려나자 정인희 청양군수는 1895년 11월 29일 청양의 채광묵(1850~1906)을 대동하고 본인이 직접 창의한 의병 180명을 이끌고 선봉장이 되어 홍주성으로 간 장본인이기도 했다.이처럼 정인희 청양군수는 지역의 유생들과 함께 민족의 혼을 일깨우는 당시 현직군수로 항일운동에 직접나선 분이였다.2. 청양의병을 창의하고 홍주의병의 중심에 선 정인희 청양군수1895년 10월 청양의병창의소를 설치하고 1895년 11월 29일 의병의 선봉장이 되어 홍주에 도착한 정인희 청양군수는 청양의 안병찬, 채광묵, 이세영, 예산의 박창로 등 여러 유생들과 거의 할 것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청양의 안병찬은 “상소를 해도 받아 줄 곳이 없는데 무슨 상소냐”라는 말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으며 1895년 12월 1일 청양의병이 을미의병인 홍주의병을 주도하게 된다.특히 이날저녁에는 청양의병 수백 명을 나그네와 장사꾼으로 변장하여 홍주성으로 잠입하는데 성공하였고 12월 2일에는 정인희 청양군수의 명을 받은 청양의 이창서(1841~1911)는 의병 수백 명을 인솔하고 의병을 반대하는 홍주부 참서관 함인학과 경무사 강호선을 체포하여 이들의 목을 벨 것을 명령하자 청양의 의병들은 경무청을 부수고 들어가 이들을 동문 밖으로 끌어내 구타하자 의병에 동참 할 수 없다던 관찰사 이승우는 결국 동참하기로 승복하였다.(다음호에 이어) 3. 정인희는 군수 직을 내려놓은 항일독립운동가 이었다.1895. 12. 3일에는 청양의병창의소를 모델로 하여 홍주에 김복한을 의병 총수로 하는 창의소를 설치하고 이승우를 홍주목사 겸 창의대장으로 임명하도록 하였으나 창의소 설치 하루 만에 이승우가 변심하자 홍주부의 각 군의 관군은 모두 회군하였으나, 오직 정인희 청양군수 만이 공주에도 창의소설치 할 목적으로 진격 중 정산전투에서 패하고 말았다.정인희 청양군수는 당시 현직 군수로서 항일정신이 충만하였으며 군수 직을 내려놓을 각오로 의병활동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1895년 12월 2일 홍주목사 이승우를 승복시키고 정산전투에서 패한 정인희 청양군수는 결국 그는 하루 만에 변심을 한 홍주목사 이승우에게 군수직을 파직당하고 말았다. 이처럼 1895년 12월 3일 거의 된 홍주의병의 모태가 된 것은 청양의병이다.다시 말해 청양은 홍주의병의 본향이며 당시 현직군수가 창의하여 가장 빨리 대응한 우리나라의 “의병 발상지”가 청양인 것이다.4. 정인희 항일정신이 녹아있는 “청양군” 청양은 충남의 서남부를 관할하던 금정찰방이 있어 전국을 아우를 수 있는 지리적으로 요충지라는 점도 배제 할 수 없으나 당시 정인희 청양군수가 의병을 창의하고 선봉에 서서 많은 지원과 활동을 아끼지 않은 점도 항일운동의 본거지로 지역적분위기가 한층 높았기 때문 일 것이다.특히 청양은 의병장 민종식이 어려서 정산에서 살았던 만큼 청양이 연고지이며 34세에 이조참판의 벼슬을 내려놓고 1895년 낙향한 것도 이를 뒷받침 해 주고 안병찬, 채광묵, 이세영, 김덕진, 등 지역유생들의 항일정신이 의병활동의 중심적 역할을 다 했기 때문이다. 특히 면암 최익현과 윤조 민종식이 청양에 둥지를 튼 것도 정인희군수가 항일운동을 하기 좋은 기반을 만들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이처럼 청양은 예로부터 나라가 어려울 때 구국일념으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불의에 나서는 忠節義 서기가 깃든 곳이 바로 “청양”이다. 이는 정인희 청양군수의 창의정신이 녹아있기 때문 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