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궁화 꽃이 피지 않았습니다. 친애하는 군민여러분! 이번에는 틀림없습니다. 기호 0번 000을 국회의원으로 당선시켜 주신다면 칠갑산 한티고개에 터널을 뚫겠습니다. 그렇다. 1970년대에 우리고장 청양은 충남의 동서를 잇는 칠갑산 터널을 갈망했었다.   청양군은 지리적으로 군의 중앙에 칠갑산이 꽈리를 틀고 앉아서 동서간의 교통을 가로막았다. 칠갑산은 청양군을 동서로 나누었고 충남을 서부지역과 동부지역으로 떨어지게 하고 서로 교통하는데 막대한 어려움을 주었다. 청양의 서부지역에 있는 청양군청에서 대전에 갈라치면 칠갑산 자락을 뱀허리처럼 꼬불꼬불하게이어진 국도36호선 한티고개 비포장도로를 위험하게 넘어 가야만 했다.   홍성, 서산, 당진의 주민들도 도청소재지인 대전에 가기 위해선 별수 없이 칠갑산자락을 넘어야 했다.   이 뱀허리 같은 도로변에 은송이란 별칭을 가진 소나무가 있었다. 1970년대 초 쯤의 일이었다. 칠갑산 산허리를 넘던 버스가 산아래로 굴렀다. 많은 사상자가 발생할 수 있는 사고였다. 그러나 마침 버스가 도로를 벗어나 산아래로 굴르려는 곳에 소나무가 있어서 버스의 굴러 떨어짐을 막았다. 천만다행으로 큰 인명사고를 모면하였다. 당시 군수는 이 소나무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어서 감사하다는 뜻으로 「은송(恩松)」이라고 판각한 패를 만들어 걸었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게 하였다. (십수년이 지난 후 비가 많이 오던 어느날 안타깝게도 산사태에 휩쓸려 더 이상 「은송(恩松)」소나무를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국회의원에 당선 된자도 칠갑산의 터널을 뚫지 못했다. 당시 부여에 선거구를 가지고 제2인자라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김종필 총재께서 나섰다. 터널 입구까지 거창하게 토목사업을 진행했다.   청양군민들은 곧 터널이 개통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자 토목 사업은 중단되었고 터널은 뚫리지 못했다. 그 이유는 청양군은 무궁화꽃이 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청와대에는 1971년도 박정희 대통령의 선거 상황판이 있었는데 그 판에 청양군은 무궁화 꽃이 피지 않았다(?)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선거에서 이긴 시군에는 무궁화 꽃을 꽂아 놓았고 각종 개발사업에 참고자료로 삼았다고 한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말 일 수도 있다.)   당시 1971년도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우리 청양군은 김대중 후보가 5표 많았다. 박정희 후보가 선거에서 진 곳이었다. 그래서 청양군은 무궁화 꽃이 피지 않았다. 우선순위에 밀려서 칠갑산의 터널은 뚫리지 못했다. 터널공사를 하는 척 하던 토목공사는 방치되었고 청양은 교통이 불편하여 대전등 대도시와 접근이 어려워졌고 날로 고장은 낙후되어 갔다. 그러다가 전두환 대통령시대에 접어들었다. 당시 정치권의 실세였던 지역의 국회의원 최창규 박사의 건의와 전두환 대통령이 군 사령관시절에 칠갑산에서 야영을 한적이 있었다는 연분이 있어서 아주 손쉽게 터널공사를 시작하였다.(일화이다,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드디어, 1983년 칠갑산 한티고개를 관통한 대치터널이 뚫렸다.   그날의 감격을 청양인들은 모두 갖고 있다.   청양읍민들은 새벽 먼동이 트기전에 수십명씩 자전거를 타고 청양읍 시가지에서 8km떨어진 칠갑산 한티고개 대치터널까지 오르막길을 달려 갔고, 터널에서 나오는 암반수를 약수처럼 마셨다.   이후 터널의 개통으로 차량교통량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위험한 자전거타기는 수그러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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